무서운 시간 - 윤동주


거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프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참회록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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