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만행 목록]

이완용 친일 전 행적 (친미)

-이완용이 친일을 하기전까지는, 고종이 이완용을 매우 총애하고 의지하였다. 순종과 이완용은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1882년 과거 합격

-1886년 미국인 교사 헐버트가 운영하는 육영공원(국제업무를 맡기 위해 고종이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제자가 됨

-1887년 대미외교 전담팀에 발탁. 고종의 신뢰를 받았음을 알 수 있음. 알렌 이라는 선교사를 만나면서 친미파 관료로 성장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후

-1896년 아관파천(고종을 러시아로 도망)

   ->이당시만 해도, 친미파 이완용은 친러파와 함께 일본을 조선에서 내보낼 생각만 하는, 고종의 믿음직스러운 신하였다.

    *이 때부터 고종은 러시아를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와 조선의 중립화를 협상한 조-러밀약을 맺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을 이완용은 당시 반대했다. 경제적 지원 없이 정치 간섭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친미파였기 때문에, 러시아가 개입되면 자기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어서, 러시아의 개입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 후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로 발령이 났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 일본이 승리했다. 러시아는 한반도를 일본에 넘긴다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미국의 도움을 받고자, 이완용을 호출하여 정계 복귀를 시켜준다.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하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체결(미국은 필리핀 점령 보장)

->조선은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완용은 나가리가 될뻔했으나, 이때부터 그는, 친일을 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온 이토 히로부미에게 붙은것이다. 

 

이완용 친일 시작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 을사5적 중 한사람.
->우리나라 외교권 박탈 당함
-1907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됨.
            헤이그특사파견으로 고종을 내려앉히고 순종을 즉위시킴(헤이그특사 파견은 을사조약을 위반) 

             정미7조약(조선 군대 해산)
-1910년 총리대신 자격으로 비밀리에 일본과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은 일제강점기 36년이 시작된것임.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고 이완용은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지위을 수여받았다. 
-매일신보에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후작 지위을 수여받았고, 그의 아들도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이완용 암살시도]
이완용 암살을 시도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름은 이재명
동지들(김정익, 이동수)와 함께 친일 매국노 암살을 계획하였다. 
김정익은 일진회 이용구 처단, 이동수는 송병준(조선일보 창업자) 처단
당시, 이재명은 습격을 시도했으나 지나가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앞을 대신 막아서서, 그가 대신 죽었다.

이완용에게 칼빵을 3번했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추후 사형당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이재명의 칼빵 덕분에, 이완용은 죽을때까지 고생했다고 한다.

 

[기타]
이완용 분당출신이다. 
"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출생 " 
지금의 판교 위치에서 태어났다. 동향이라니 짜증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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